저명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양자이론의 ‘관계론적 해석’ 제시
확정된 실체들의 우주는 허구
모든 것은 상호작용 관계로 구성
이탈리아 출신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 위키미디어 코먼스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l 쌤앤파커스 l 1만8000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 발견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양자역학이 꼽힌다. 아원자의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세계를 보는 근본 관점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을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양자역학이 정립한 이론에 따라 인류는 원자폭탄을 제조했고 수많은 첨단 기술을 개발했다. 그렇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도 양자역학은 탄생 1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다. 양자이론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한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67)가 쓴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2020)은 양자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헬골란트’(Helgoland)다. ‘성스러운 땅’을 뜻하는 헬골란트는 북해에 있는 조그마한 독일 영토의 섬이다. 1925년 여름 23살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는 원자 세계 내부 전자의 기이한 움직임을 이해해보려고 홀로 이 섬을 찾았다. 며칠을 골몰하던 하이젠베르크는 새벽 3시에 마침내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수식을 끌어냈다. 양자이론의 탄생이었다! 이 혁명과 함께 ‘세계는 고정된 물질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전 물리학의 세계상이 붕괴했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 양자이론의 신비를 해명하는 데로 나아간다. 로벨리가 주목하는 하이젠베르크 혁명의 핵심은 ‘관찰’이라는 행위에 있다. “양자이론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물질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 입자를 어떤 지점에서 찾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말해줄 뿐이다.” 빛 알갱이 곧 광자를 예로 들어보자. 검출기에서 나오는 광자를 관찰하기 전에는 광자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는다. 하나의 광자가 동시에 두 경로를 지나간다. 이것을 ‘양자 중첩’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관찰자가 그 경로 가운데 하나를 관찰하면, 그 경로가 사라지고 광자는 다른 한쪽 경로로만 움직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하이젠베르크의 공적은 그 현상을 정확한 수식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수식이 그 기이한 현상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명하지는 못했다. “하이젠베르크는 헬골란트에서 진리를 가리고 있던 장막을 걷어냈다. 그런데 그 장막 너머에서 나타난 것은 심연이었다.” 그 뒤 100년 동안 물리학자들은 이 양자 현상이 가리키는 세계의 실상을 밝혀내려고 여러 이론을 제출했다. 평행우주론도 그중 하나다. 이 책은 그 이론들을 간략히 검토한 뒤 모두 부적격 판정을 내린다. 그렇다면 양자이론이 가리키는 세계의 실상은 무엇인가? 여기서 로벨리는 자신이 ‘관계론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양자이론의 기초로 돌아가 보자. 광자가 방출될 때 관찰자가 개입하면 파동함수가 붕괴해 광자는 하나의 경로만 따른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 관찰자의 존재다. 관찰자가 없다면 광자는 파동함수에 따라 두 경로로 동시에 이동한다. 이 관찰자가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지금껏 학자들은 관찰자를 양자 세계 바깥에 있는 특별한 존재로 간주했다. 그러나 관찰자는 이 우주 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본질은 관찰자가 양자적 대상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 대상의 속성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관찰자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놓아보면 어떨까? 관찰자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양자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양자 세계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이 관찰자와 똑같은 작용을 일으킨다. 여기서 도출되는 것은 양자의 속성은 양자를 둘러싼 다른 대상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위치나 속도를 비롯한 양자의 속성은 관계 바깥에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보면, ‘고유한 속성을 지닌 불변의 실체’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관계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특정한 맥락에 따라 일시적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뿐임이 드러난다. 세계는 상호작용하는 양자적 대상의 광대한 네트워크다. 우리가 ‘실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네트워크의 그물을 잇는 매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이 없다면 양자적 대상의 속성도 없다. 속성은 상호작용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며 그 상호작용이 사라지면 속성도 사라진다. “이 세계 속에 있는 것은 확정된 속성을 지닌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게다가 상호작용할 때만 속성과 특징을 띠는 존재들이다.” 양자 세계에서 모든 입자는 확고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우리가 양자 세계보다 훨씬 큰 거시적 일상 세계에 살고 있기에,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견고한 실체로 보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양자 세계는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와 같다. 그 바다를 멀리 달에서 관찰하면 푸른 구슬의 매끈한 표면처럼 보이는 것이다. 양자 세계는 상호작용이라는 관계를 통해 속성이 일시적으로 결정되는 세계이므로, 확정된 속성을 지닌 불변의 실체라는 우리의 통상적 인식은 양자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그 양자 세계를 바탕으로 삼는 우리의 거시세계도 근원적으로는 이런 관계적 속성으로 구성된 세계다. 로벨리는 이런 관점을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거론한다. 나가르주나(용수)가 가르친 공 사상의 핵심은 “다른 어떤 것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만 그것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공’이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 다른 것과 관련해,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가르침이다. 이 공의 가르침은 모든 실체가 고유한 실체가 아니라, 관계 곧 상호작용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양자이론의 관계론적 해석과 그대로 통한다. 이 관계론은 “우리의 자아, 우리의 사회, 우리의 문화적·정신적·정치적 삶”으로도 확장된다.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통틀어 영속적 실체는 없고 상호작용하는 관계만 있을 뿐이다. 세계상의 일대 전환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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