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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빅뱅이론 시초도 불과 100년 전…한국 우주 진출,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 경향신문

(30) 우리가 우주로 가는 이유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그 후 40년
한국은 누리호를 지구궤도로 쐈다
8월에 달 탐사선 ‘다누리’ 보내면
세계서 7번째로 달에 가는 나라로

“우리는 아폴로의 달 착륙을 보며 꿈을 키웠지만 너희는 누리호를 보며 우주의 꿈을 키우게 될 거야.” 어린아이가 모형 우주선을 들고 등장하는 어느 국내기업의 광고 첫 문구이다. 나는 1971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70년대 내 또래의 동네 꼬마들이 아폴로 우주선을 보며 꿈을 키운 건 사실이다. 그로부터 약 40년이 지난 2020년대는 한국의 우주진출사에 가장 획기적인 시대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작년 10월에 우리는 한국형우주발사체 누리호의 1차 발사에 성공했다. 누리호는 추력 75t급 엔진을 네 개 묶어 만든 300t급의 1단과 75t급 1기의 2단, 그리고 7t급 엔진 1기의 3단으로 구성된 다단 발사체로서, 우리의 독자적인 기술로 설계, 제작, 시험 및 발사 운용의 전단계가 진행되었다. 누리호는 지구상공 600~800㎞에 1.5t급 실용위성을 직접 투입할 수 있다. 작년 1차 발사에서는 300t급 1단 엔진이 성공적으로 작동함을 확인했으며 1단과 2단, 2단과 3단이 성공적으로 분리 및 점화되어 발사체의 단분리 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모형 위성을 목표고도인 700㎞ 상공까지 올려보내는 데에도 성공했다. 다만 모형 위성을 지구궤도에 진입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궤도진입에 필요한 초속 7.5㎞의 속력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형 위성이 원하는 속력을 얻지 못한 이유는 누리호 3단부의 산화제(액체산소) 탱크 속에 있던 헬륨탱크의 고정지지대가 풀리면서 헬륨탱크가 돌아다니며 산화제 탱크에 균열이 생겨 산화제가 누설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521초 동안 연소할 예정이었던 3단 엔진이 46초 빨리 연소 종료되면서 원하는 속력에 이르지 못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발사 36초 만에 3단 탱크에서 충격이 발생했다고 한다. 헬륨탱크의 지지대는 발사체가 지상에 정지해 있을 때를 기준으로 설계된 탓에 발사체가 우주로 비행할 때 받는 가속도에 의한 부력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때의 최대가속도의 크기는 중력가속도 크기의 4.3배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16일로 예정됐던 2차 발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산화제 탱크 및 헬륨탱크 지지대를 보강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2차 발사에서는 모형 위성 대신 실제 작동하는 성능검증 위성과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초소형 큐브위성 4기가 함께 탑재돼 있었다. 아쉽게도 센서 문제로 발사가 연기되었으나 향후 2차 발사가 성공한다면 이제 자체 발사체로 자체 위성을 마음껏 우주로 쏘아 올릴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누리호는 내년 이후로도 계속 우주로 향할 계획이다.

한편 올 8월3일에는 한국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가 미국 스페이스X 사의 팰컨9 로켓에 실려 12월 달고도 100㎞의 궤도에 진입할 예정이다. 보통 다른 천체를 탐사할 때 해당 천체 주변을 궤도비행하면서 그 천체의 인공위성이 되어 탐사를 진행하는 궤도선이 있고, 직접 그 천체 표면에 착륙해 탐사하는 착륙선이 있다. 다누리호가 달 궤도 진입에 성공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7번째로 달에 가는 나라가 된다.

달 궤도선과는 별도로 당연히 달 착륙선도 준비 중이다. 달 궤도선은 미국의 발사체를 이용하지만 달 착륙선은 우리가 개발하는 신형 발사체로 보낸다. 달까지 착륙선을 보내려면 누리호보다 더 성능이 좋은 발사체가 필요하다. 한국 최초의 달 착륙선은 2031년에 발사될 예정이다.

달에 전진 기지를 구축하고 나면
심우주·화성 진출 교두보 확보돼
누리호 발사 성공 여부가 ‘변곡점’

한국은 2021년 미국 주도의 달 탐사 계획인 아르테미스 계획에 함께 참여하기로 했다. 아르테미스 계획은 말하자면 달에 일종의 전진기지를 구축하는 계획으로 이전의 달 탐사와는 레벨이 다르다. 이후 심우주 탐사나 화성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약 10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21세기 우주 진출의 판도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누리호 2차 발사가 연기된 것에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최소 10년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긴 호흡의 인내가 필요하다.

잠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 과거를 돌아보자면, 한 세기 전인 1920년대는 현대적인 과학으로서의 우주론이 정립되던 시기였다. 1920년에는 미국에서 이른바 ‘대논쟁(great debate)’이 있었다. 미국의 천문학자인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가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 벌인 이 논쟁의 쟁점은 나선 성운의 정체와 다른 은하의 존재 여부, 그리고 우리 우주의 크기와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섀플리는 우리의 은하수 은하가 우주 전체이며 다른 성운들은 모두 은하수 은하 안에 있다고 주장했고 커티스는 성운이 독립된 은하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 등장한 성운들 중에는 안드로메다 성운도 있었다.

안드로메다가 ‘은하’ 인정된 것도
팽창하는 우주론이 정립된 것도
인류의 오랜 역사 중 지극히 최근
그래서 우리는 서둘러 우주로 간다

대논쟁이 끝난 것은 공교롭게도 안드로메다 성운 덕분이었다. 20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라 할 수 있는 에드윈 허블은 1923년 당시 최대 망원경인 윌슨 산 천문대의 100인치짜리 후커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을 관측해 지구로부터의 거리가 우리 은하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안드로메다가 독립적인 은하라는 강력한 증거였다. 그러니까, 안드로메다가 ‘은하’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 겨우 100년 전의 일이다. 지금 우리가 알기로 관측 가능한 우주에서 은하는 수천억개 내지 수조개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꼭 100년 전인 1922년에는 러시아의 물리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이용해 동적으로 진화하는 우주론을 제시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중력의 본질을 시공간의 휘어짐으로 이해한다. 태양처럼 무거운 물체가 있으면 그 주변의 시간과 공간이 뒤틀린다. 주변의 물체는 그렇게 뒤틀린 시공간의 최단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은 1915년 일반상대성이론의 핵심인 중력장 방정식을 완성한 뒤 1917년 이를 우주 전체에 적용했다. 과학이론으로서의 우주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영원불멸이며 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어떤 관측적인 근거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 가까웠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일반상대성이론을 우주에 적용한 결과는 아인슈타인의 기대와 반대로 시간에 따라 다이내믹하게 진화하는 동적인 우주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장 방정식에 ‘임의로’ 항을 하나 추가했다. 이를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라 한다. 이 항은 질량이 있는 물체의 중력 작용을 상쇄하는 역할을 한다. 우주상수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신념에 우주를 꿰맞추기 위해 자신의 방정식에 임의로 도입한 항이라 아인슈타인 자신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우주상수가 지탱하는 정적인 우주는 마치 축구공 위에 올려놓은 구슬처럼 위태롭게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영원불멸이라는 자신의 우주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아인슈타인에 반기를 든 것이 프리드만이었다. 프리드만은 우주의 초기조건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주가 진화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반중력의 효과를 주는 우주상수가 없더라도 애초에 우주가 어떤 이유로 팽창하고 있었다면 별이나 은하처럼 우주에서 중력 작용을 주는 요소들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우주의 진화가 달라짐을 보였다. 만약 중력 작용의 요소가 너무나 강력하다면 팽창하던 우주는 어느 순간 팽창을 멈추고 다시 중력수축을 시작할 것이다. 반면 중력 작용의 요소가 너무 미약하면 계속 팽창할 것이다. 한편 중력 작용의 요소가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다면 팽창이 점점 느려지지만 영원히 팽창을 계속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인슈타인도 프리드만의 논문을 알고 있었으나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몇 년 뒤에도 반복되었다. 벨기에의 신부 출신 물리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는 프리드만과는 독립적으로 동적인 우주, 특히 팽창하는 우주론을 정립했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국제학회 중 하나였던 1927년의 솔베이학회에서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에게 팽창하는 우주론을 설명했으나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에게 핀잔을 주고 말았다.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29년 미국의 허블은 윌슨 산 천문대의 후커 망원경으로 외계은하의 음직임을 관찰해 모든 외계은하가 지구로부터의 거리에 비례하는 속력으로 멀어지고 있음을 밝혀냈다. 허블의 발견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로서 아인슈타인이 주장했던 영원불멸의 정적인 우주론을 무너뜨렸다. 허블이 발견한 결과는 르메트르가 이미 1927년 자신의 팽창하는 우주론에서 예견한 현상이었다. 허블이 발견한 결과는 오랫동안 ‘허블의 법칙’으로 불렸으나 2018년 국제천문연맹은 ‘허블-르메트르의 법칙’으로 부를 것을 권고했다.

르메트르는 자신의 팽창하는 우주론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힌트를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렸을 때 우주의 모든 것이 굉장히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르메트르는 이를 ‘원시원자’라 불렀다. 이는 현대적인 빅뱅우주론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이처럼 1920년대는 관측과 이론 모두에서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혁명적으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인류가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 인류의 오랜 역사 중에서 지극히 최근에 불과하다. 우주의 광활함을 생각하면 우리 인간은 참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지만, 스티븐 호킹의 말마따나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선진국들보다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라도 우리가 서둘러 우주로 진출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한두 번의 실수나 실패에 좌절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주로 가는 거란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빅뱅이론 시초도 불과 100년 전…한국 우주 진출,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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