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짠내수집일지 미개봉 엘피
가사집·화보까지 품은 ‘극상품’
‘신해철 2집’ 등 들으려 샀는데
뜯으면 가치 하락…모셔두기만
1991년 발매된 신해철 2집(아랫줄 왼쪽에서 세번째) 등 포장을 아직 뜯지 않은 미개봉 엘피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엘피(LP)를 수집하는 목적은 아날로그로 음악을 들으려는 것이다. 턴테이블에 올린 엘피가 1분에 33과 3분의 1회 회전하는 동안 플라스틱 원판에 미세한 소릿골을 카트리지 바늘이 긁고 지나가며 미세한 소리를 잡아내고, 이걸 앰프로 증폭해 스피커로 듣는 게 엘피 음악 감상의 기본 원리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소릿골이 마모되면서 지직거림 등이 발생하는데 되레 은근한 편안함을 안겨준다. 재생 과정에 수고가 따르지만 음원을 디지털 형태로 잘라낸 스트리밍이나 시디(CD)보다 원음에 더 가까운 소리로도 평가받는다.
엠제트(MZ) 세대도 엘피를 찾게 되면서 21세기 들어 유명 가수들도 신곡을 낼 때 소량의 엘피를 제작한다. 대개 4~5만원 선에 판매하는데 음반 수량이 워낙 적어 순식간에 동나고, 중고시장에선 발매 다음 날 포장도 뜯지 않고 수십배 가격에 거래된다. 2014년 아이유가 한정판으로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엘피는 한때 300만원을 호가했고, 지금도 200만원 안팎에서 거래된다. 잔나비, 장기하와 얼굴들의 엘피도 수십만원이다. 이른바 ‘업자’들이 싹쓸이한 뒤 수십만원에 재판매한다는 얘기까지 나돌면서 몇몇 가수는 차라리 주문을 받아 그 수요만큼 엘피를 만들어 업자의 농간으로부터 팬과 선의의 수집가를 보호하자는 운동도 펼친다. 이에 견줘 엘피 전성시대의 중고 엘피는 발품만 열심히 팔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물론 김정미, 신중현과 엽전들 등 몇몇 아티스트의 희귀 음반은 중고라도 상상 이상의 가격을 부르지만 아직도 서울 황학동, 동묘 인근 노점에서 1만~2만원 안팎에 1970~80년대 웬만한 가요 엘피를 얻는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시절 발매 당시 밀봉한 비닐 포장조차 뜯지 않은 미개봉 엘피 가격은 비싸다. 재킷과 음반 등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민트’(손상이 전혀 없는 신제품과 같은 중고품)급 음반은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데, 발매 당시 비닐 포장을 그대로 간직한 엘피는 그보다 몇배 더 비싸다. 엘피의 훼손을 막기 위한 속지는 물론 동봉된 가사집이나 화보까지 온전하기 때문에 수집가들 역시 ‘극상의 상태’인 미개봉 음반을 구하려 한다. 물론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보유하고 있는 미개봉 엘피는 19장이다. 엘피 수집에 한창 재미를 붙이던 2014년, 황학동에 ‘청원 레코드’라는 가게가 있었다. 지금도 엘피 수집가들에겐 ‘성지’로 불리는 돌레코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았을 당시엔 중고 디브이디(DVD) 판매와 수선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1980~90년대 하루에 수백장씩 엘피를 팔았다”는 사장님은 “이제 엘피 장사로는 먹고살기 어려워 사실상 전업을 했다”고 말했다. 간판만 보고 들어갔다 고장 난 디브이디플레이어 더미 뒤편에 방치된 희귀 엘피를 발견한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 듯 한동안 그곳에 갔다. 사장님은 처음엔 “어차피 그게 주업은 아니니까 5000원에 1장씩 가져가라”고 했다. 지금처럼 엘피가 인기 품목이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난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모두 사들였을 것이다. 당시 내가 월급 받을 때마다 엘피 수집에 쓸 수 있던 돈은 20만~30만원. 고르고 또 골라 선택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가격은 점점 올랐다. ‘저렴한 가격에 희귀음반만 가져가면 나머지는 팔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가격은 7천원, 그다음엔 1만원으로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싼 가격인데 단골에게 너무 야박하게 군다 싶고, 1만원이면 더 신중하게 다른 곳도 뒤져야 한다는 생각에 어느 순간 발길을 끊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나는 당시 이곳에서 미개봉 엘피 대부분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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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미개봉 엘피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심리적 갈등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뜯어서 듣느냐, 그대로 두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살 때는 듣고 싶어 샀다. 하지만 비닐을 뜯는 순간 가격은 최소 3분의 1로 떨어진다. 고민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왕 신해철이 1991년 낸 두 번째 솔로 정규앨범인 ‘마이셀프’는 모든 수록곡을 자작곡으로 구성한 앨범이다. 나무위키는 ‘신해철이 혼자 작사, 작곡, 편곡, 악기연주, 프로듀싱을 한 원맨 밴드 형식의 앨범으로,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초로 미디(MIDI·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적극 활용하여 작업 & 녹음한 역사적 앨범’이라고 설명한다. 모두 9곡이 실린 이 안에는 1988년 문화방송(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인 ‘그대에게’를 새롭게 편곡한 것은 물론 4분31초짜리 명곡 ‘재즈 카페’도 실려있다. 유튜브와 디지털 음원으로 수없이 반복해 들었지만 엘피로 듣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서 거의 10년째 개봉도 못 한 채 그냥 모시고 있다. 이은하의 히트곡 ‘봄비’ ‘밤차’ ‘아리송해’ 등이 수록된 음반도, ‘울면서 후회하네’가 실린 주현미, ‘내 인생은 나의 것’이 담긴 민혜경, ‘갈 테면 가라지’가 수록된 권인하, ‘난 어디로’와 ‘치키치키 차카차카’ 등이 실린 김수철 음반도 다 미개봉 상태다. 분명 들으려고 샀고, 딱히 되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비닐 커버를 뜯지 못한다. 지인이 선물로 준 ‘하얀 나비’를 수록한 김정호 3집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개봉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한때 신효범의 광팬이었던 나는 ‘난 널 사랑해’ ‘또 하나의 너’를 엘피로 듣고 싶어 1994년 발매한 신효범 4집의 포장지를 뜯어 턴테이블에 얹었다. 만족은 잠시, 곧 큰 후회가 밀려왔다. 그 뒤부터 쉽사리 미개봉 음반을 뜯지 않는다. 속물 같지만 감동은 순간, 자산 가치는 영원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내도 말린다. “엘피 듣는 건 이해해. 그런데 무슨 절대 음감을 가진 것도 아니고 ‘막귀’ 수준인데 엘피 값어치를 그렇게 떨구려 하는 건데?” 뭐 딱히 반박하지 못한다. 나 스스로 수없이 똑같은 고민을 하기 때문이다. 참고 기다리면 소장 중인 미개봉 엘피와 같은 저렴한 개봉 중고 엘피가 손안에 들어올 때도 있다. 작은 거인 김수철 엘피가 그런 경우다. 최근 인터넷 공간에서 미개봉이라며 개봉했던 중고 엘피를 깨끗하게 밀봉 비닐만 새로 씌워 봉인한 뒤 판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들 역시 듣는 것보다 장식 효과를 노리고, ‘극상의 음반 상태’를 선호하는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안 뜯고 모셔두면 영원히 속은 걸 모를 수도 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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